
1980년, 섬유회사로만 알려진 선경(SK 전신)이 자신보다 수백 배 큰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준비된 새우는 정말로 고래를 삼킬 수 있었다. 두 차례 석유파동 때 사우디 왕실과의 인맥으로 한국 전체가 필요한 원유를 공급했던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업 스토리
1953년 10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원 평동에 작은 직물회사가 문을 열었다. 27세 청년 최종건이 빚까지 내며 인수한 선경직물이 바로 SK이노베이션의 출발점이다. 최종건은 1944년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입사해 입사 2년 만에 생산부장까지 승진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공장을 적산으로 지정하자 관리인으로 남았고, 1953년 마침내 인수 기회를 잡았다. 계약금만 13만 환, 당시 쌀 1,300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부친의 도움과 지인의 지가증권을 담보로 간신히 마련한 돈으로 1만 2,000평 공장을 소유하게 됐다.
성장과 위기
첫 번째 위기는 원사 부족이었다. 최종건은 원사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1968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연달아 완공하며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올라섰다. 두 번째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정유사업 공장 건설이 무산됐지만, 석유파동으로 원유 확보가 국가 생존 문제가 되자 선경의 진가가 드러났다. 최종건 회장이 직접 사우디로 날아가 원유 공급 약속을 받아왔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 인수가 실현됐다. 현대적 전환점은 배터리 사업이다. 2010년 국내 첫 순수 전기차 현대 블루온에 배터리를 공급하기 시작해 메르세데스-벤츠·포드·페라리까지 고객사로 확보했다. 2021년 세계 5위 배터리 공급업체가 됐다.
지금 뭐 하는 회사인가
2024년 SK E&S와 합병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최대 에너지 회사로 거듭났다. 석유 탐사부터 정유·석유화학·전력·배터리까지 에너지 전 분야를 아우른다. 2024년 연간 매출 74조 7,000억 원, 영업이익 3,000억 원을 기록했다. 시가총액은 12조 원 수준이다. 울산 공장 배관을 모두 이으면 지구 둘레를 15바퀴 돌 수 있는 길이다. 골칫덩이도 있다. 2021년 분사한 배터리 자회사 SK온이 2024년 5,81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반면 베트남 15-2/17 광구에서 원유 부존을 확인하고 시험 생산에 성공하는 성과도 있었다.
투자 포인트
SK이노베이션은 전형적인 경기순환주다. 유가와 정유 마진이 실적을 좌우한다. 배터리 사업 부진이 단기 발목을 잡고 있지만 70년간 석유파동·외환위기·금융위기를 모두 견뎌낸 생존력은 여전하다. 2062년 올 타임 넷 제로를 선언했지만 그때까지 수익성을 유지하며 사업 전환을 이뤄낼 수 있는지가 중장기 투자 판단의 핵심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