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D현대는 조선회사가 아니다. 정확히는 조선회사의 지주사다. 실제로 배를 만드는 건 자회사인 HD현대중공업이고, HD현대는 그 위에서 그룹 전체를 컨트롤하는 꼭대기 회사다. 이름에서 '중공업'을 떼어내고 'HD현대'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HD는 Human Dynamics, Human Dreams. 조선·중공업 이미지를 지우고 미래 에너지·로보틱스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선언이다. 독자 CI를 만들면서 자회사들에게 상표권 사용료를 받는 구조가 생겼고 연간 400억 원대 수입이 발생하는 실용적 효과도 따라왔다.
창업 스토리
이야기는 1971년으로 시작된다.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조선소를 짓겠다고 작정했다. 미국에 빌리러 갔더니 거절, 일본도 거절. 그는 유럽으로 향했다. 손에 든 건 두 가지뿐이었다.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00원짜리 지폐 한 장.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이 바로 퇴짜를 놨다. 정주영은 선박 컨설턴트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톰도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이때 정주영이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든 민족입니다." 이 한마디가 롱바톰을 움직였고 은행 차관 추천서를 받아냈다. 은행은 다시 "배 주문을 먼저 받아오면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소도 없는데 배 주문을 받아오라는 요구였다. 정주영은 백사장 사진 한 장 들고 유럽 해운업자들을 찾아다녔다. 결국 그리스의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설득해 26만 톤짜리 배 두 척 주문을 받아냈다. 1972년 울산조선소 기공식, 1974년 조선소 준공식과 1·2호선 명명식을 동시에 열었다. 조선소 짓는 도중에 배도 같이 짓는 세계 조선 역사에 전무한 기록이었다.
성장과 위기
기공식에서 딱 11년 뒤인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건조량 222만 톤을 기록하며 세계 1위에 올라섰다. 황무지에서 출발해 10년 만에 세계 정상이었다. 2016년 조선업 불황이 찾아오면서 그룹은 살아남기 위한 재편에 돌입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했지만 EU가 독점 우려를 이유로 불허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한화그룹이 치고 들어와 대우조선해양을 가져갔다. 지금의 한화오션이다. 합병 실패가 오히려 강력한 경쟁자를 키운 역설이었다. 2024년 정기선 회장이 취임하면서 3세 경영이 본격화됐다.
지금 뭐 하는 회사인가
2025년 기준 HD현대그룹의 연결 매출은 71조 원, 영업이익은 6조 원이다.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두 배 넘게 뛰었다. 조선 부문(HD한국조선해양) 영업이익이 172% 증가했고, 전력기기 부문(HD현대일렉트릭)도 48.8% 성장했다. 사업 포트폴리오는 조선·해양·에너지·전력기기·건설기계·로보틱스 네 축이다. AI 열풍에 데이터센터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력 인프라 수요가 급증했고, 그 수혜를 HD현대일렉트릭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2026년 4월 기준 상장 계열사 시가총액 합산이 200조 원을 돌파했다. 그룹 목표는 2030년 매출 100조 원이다. 정기선 회장은 미 해군성 장관을 울산 조선소로 초청했고, 미 상무장관과 한·미 조선산업 공동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투자 포인트
HD현대는 지주사다. 조선이 잘 되면 HD현대중공업이 오르고 전력기기가 뜨면 HD현대일렉트릭이 오르는 구조로, 지주사 자체는 이 모든 성과를 간접 흡수한다. 일반적으로 지주사는 자회사 대비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는 지주사 디스카운트가 적용된다. 조선 사이클과 AI 전력 인프라라는 두 엔진이 동시에 가동되는 점은 강점이다. 다만 지주사 디스카운트 해소 방향과 한화오션이라는 강력한 경쟁자 등장이 함께 점검해야 할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