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1위 조선사와 2위 조선사가 합치려 했다. 성사됐다면 LNG 운반선 점유율 60%를 넘는 초대형 공룡이 탄생할 판이었다. 카자흐스탄·싱가포르·중국도 통과. 그런데 EU에서 딱 막혔다. 2년을 끌다가. 이 사건 하나로 한국 조선업의 판도가 바뀌었고, HD한국조선해양이라는 회사의 탄생 배경 자체가 이 합병을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창업 스토리
HD한국조선해양의 뿌리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를 세울 때 가진 것은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 한 장, 5만분의 1 지도 한 장,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선박 도면 한 장이었다. 이것을 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 수주 계약을 따냈다. 영국 은행에서는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한국은 수백 년 전부터 철갑선을 만든 나라"라고 설득했다. 아직 조선소도 없는데 그리스 선박왕 조지 라바노스를 찾아가 유조선 2척 수주 계약을 따낸 것이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었고 2년 3개월 뒤인 1974년 조선소 준공식과 선박 인도 명명식을 같은 날 열었다. 1973년 공식 설립된 현대중공업은 창업 10년 만에 세계 1위 조선사로 올라섰다. 2006년에는 세계 최초로 선박 건조량 1억 톤을 돌파했다.
성장과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양플랜트에 뛰어들었지만 기술 역량과 발주 취소가 맞물리며 조선 3사 전체가 정부로부터 12조 원의 유동성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 위기가 2019년의 대형 결정으로 이어진다. 현대중공업그룹이 대우조선해양 인수 본계약을 체결했다. 이 인수를 위해 현대중공업을 두 개로 쪼갰다. 중간 지주사는 한국조선해양, 실제 조선·제조는 새로운 현대중공업으로 분리됐다. 지금도 코스피에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이 동시에 상장돼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카자흐스탄·싱가포르·중국이 차례로 승인했지만 2022년 1월 13일 유럽집행위원회가 불허 결정을 내렸다. 6조 원 규모의 빅딜이 그렇게 끝났다. 대우조선해양은 결국 한화그룹에 넘어가 지금의 한화오션이 됐다.
지금 뭐 하는 회사인가
HD한국조선해양은 자회사인 HD현대중공업·HD현대삼호·HD현대미포를 아우르는 조선 지주사 구조다. 시가총액은 약 31조 원대로 코스피 29위권이다. 2025년 기준 매출 29조 9,332억 원, 영업이익 3조 9,045억 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72% 이상 뛰었다. 2026년 1분기 영업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57.8% 증가했다. 연간 수주 목표의 97.4%를 잠정 달성한 상태에서 LNG선·탱커선·컨테이너선 발주 흐름도 강하다.
투자 포인트
조선업은 수주→건조→인도까지 수년이 걸리는 긴 사이클의 산업이다. 지금 수주하는 배가 매출로 잡히는 것은 2~3년 뒤다. 현재 실적 호조와 수주 강도가 맞물려 앞으로 2~3년 실적 가시성이 높다. 다만 지주사로서 자회사 대비 할인이 얼마나 반영되느냐, 지분 구조가 어떻게 되느냐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 한화오션이라는 강력한 경쟁자 등장도 함께 고려할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