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기, AI 시대의 보이지 않는 거인이 깨어났다
삼성전기는 이름만 들으면 삼성전자의 자회사쯤으로 넘기기 쉬운 기업이다. 그러나 코스피 시가총액 기준 5위권 안에 드는 날이 생겼고, 삼성물산·KB금융·LG에너지솔루션보다 시총이 높은 구간이 만들어졌다. 2026년 5월, 단 하루 만에 주가가 13% 이상 뛰며 시총이 90조 원에 육박했다. 대중 인지도와 실제 기업 가치 사이의 극명한 괴리. 그것이 삼성전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창업 스토리 — 완제품의 백스테이지
삼성전기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선언부터 짚어야 한다. 1960년대 후반, 이병철 회장은 전자산업 진출을 공식화했고, 이 흐름 위에서 1973년 삼성전자·일본 산요전기 등 4개 사가 합작해 '삼성산요파츠'를 설립했다. TV와 전자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한 공장이 시작점이었다. 완제품 사업의 백스테이지, 그것이 삼성전기의 출발이었다.
사명은 총 네 차례 바뀌었다. 삼성산요파츠 → 삼성전기파츠 → 삼성전자부품 → 삼성전기. 1983년에는 합작 파트너였던 일본 산요전기의 지분을 역으로 사들였고, 1987년 지금의 사명인 '삼성전기'로 최종 정착했다. 기술을 배우러 손잡았던 파트너의 지분을 되사들이는 것, 그 자체가 기술 독립 선언이었다.
성장과 위기 — 가지치기의 역사
1988년, 삼성전기는 국내 최초로 MLCC(적층세라믹 콘덴서) 개발에 성공했다. 쌀 한 톨의 250분의 1 크기, 두께 0.3mm 안에 수백 개의 층을 쌓아 전기를 저장했다가 일정하게 흘려보내는 부품이다. 댐의 역할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스마트폰 하나에 이 MLCC가 1,000개 이상 들어간다.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기기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 부품이다.
2000년대 들어 삼성전기는 세계 최초 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세계 최소형 0603 MLCC, 초소형 0402 MLCC, 차세대 인쇄회로기판 공법 상용화까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10년 사이에 이렇게 많이 붙은 국내 부품 기업은 드물다.
혹독한 겨울도 있었다. 2022년부터 IT 업황이 급격히 꺾이면서 MLCC 재고가 쌓이고 실적이 직격탄을 맞았다. 삼성전기는 이 시기에 오히려 칼을 꺼냈다. 와이파이 모듈 사업을 매각하고 비주력 사업을 정리했다. 빼고, 팔고, 집중하는 것. 삼성전기의 성장 공식은 결국 '가지치기의 역사'였다.
그리고 AI 서버 붐이 판을 바꿨다. AI 서버 한 대는 기존 IT 기기보다 훨씬 많은 MLCC와 고사양 반도체 기판을 필요로 한다. 정리하고 집중했던 사업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운이 아니라 준비였다.
지금 뭐 하는 회사 — 세 개의 엔진
삼성전기의 사업은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된다. MLCC를 중심으로 한 컴포넌트 사업, AI 가속기용 반도체 패키지기판(FC-BGA), 그리고 카메라모듈이다. MLCC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2위로, 일본 무라타와 함께 사실상 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FC-BGA 기판은 AMD, 엔비디아 같은 빅테크에 납품 중이며, 국내 1위·세계 3~4위권의 위상이다.
2026년 1분기에는 창사 최초로 분기 매출 3조 2,091억 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은 2,806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뉴스는 따로 있다. 글로벌 대형 기업을 대상으로 1조 5,570억 원 규모의 실리콘 커패시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실리콘 커패시터는 기존 MLCC보다 고온·고주파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차세대 핵심 수동부품이다. 계약 규모는 2025년 연매출의 13.8% 수준을 단일 신사업 계약으로 따낸 것이다. 이 공시가 나온 날 주가는 하루에 13% 이상 급등했다.
세종·부산 사업장에 FC-BGA 생산라인을 신설할 예정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애플과 반도체용 글래스 기판 공급 협의도 진행 중이다. AMD에 이어 애플·엔비디아로 빅테크 고객 라인업이 확장되는 그림이다.
투자 포인트 — 긍정 요인과 변수
긍정 요인은 명확하다. AI 슈퍼사이클 속에서 MLCC·FC-BGA·실리콘커패시터 세 개의 엔진이 동시에 가동되고 있다. iM증권은 2026년~2028년 영업이익을 각각 1조 5,880억·2조 8,480억·3조 7,580억 원으로 전망하며, 2025년부터 2028년까지 영업이익 연평균 약 60% 성장을 제시했다. 사업 모델 자체도 과거 경기 민감형에서 장기 공급계약 기반의 구조적 성장 모델로 전환되고 있다는 평가다. MLCC 가동률은 이미 95~100% 수준이며, 경쟁사들의 가격 인상 선언은 삼성전기의 추가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변수도 있다. AI 서버 투자가 예상보다 빠르게 집중되는 구간에서 수요가 꺾일 경우 실적 피크아웃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 기조가 강화되면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생긴다. 주가는 이미 구조적 성장을 상당 부분 선반영한 상태라는 점에서 신규 진입 시 진입 구간 선택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보이지 않는 거인, 지금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시점이다
삼성전기는 53년간 이름을 네 번 바꾸고, 파트너의 지분을 역으로 사들이고, 불황 속에서 비주력을 정리하며 핵심만 남겼다. MLCC, FC-BGA, 실리콘커패시터. 세 개의 엔진이 AI 시대와 정확히 맞물리는 지점에서, 보이지 않던 거인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