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모주 청약도 미달났던 게임사가 26일 만에 연간 매출을 뛰어넘었다
한국 게임 하면 보통 3N을 떠올린다. 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 그런데 이 셋 다 제쳐놓고, 2026년 상반기 북미·유럽 콘솔 게임 판매 순위 2위를 차지한 한국 회사가 있다. 경기도 안양 오피스텔에서 직원 7명으로 시작한 회사. 공모주 청약도 미달됐던 회사. 3년 연속 적자를 내며 '양치기 소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회사. 바로 펄어비스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고졸이다.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기획자는 게임 개발에 필요없다'는 철학으로 회사를 세웠다. 처음 들으면 황당한 이야기인데, 결과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창업 스토리
1980년, 전라남도 완도. 김대일은 미곡상, 그러니까 쌀가게 집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파고들었고, 고3 때 한양대 안산캠퍼스 컴퓨터공학과에 붙었지만 2학년 때 그냥 나와버렸다. 게임을 직접 만들고 싶어서였다. 이후 가마소프트에 입사해 말단 프로그래머로 시작했는데, 입사 3년 만에 프로젝트 개발총괄을 맡았다. 스무 살 초반의 일이다.
그다음 둥지는 NHN, 지금의 네이버다. 여기서 R2와 C9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C9은 2009년 대한민국게임대상 대상을 수상했고, 김대일은 그해 역대 최연소로 '우수개발자상'을 받았다. 화려한 커리어의 정점. 바로 그때 사표를 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만들고 싶은 게임을 못 만들겠다는 것. 기획자들과의 마찰이 쌓였고, 개발자가 마음껏 만드는 회사를 직접 차리기로 했다. 2010년 9월, 경기도 안양의 한 오피스텔. 직원 7명. 그게 펄어비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회사엔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획자'라는 포지션이 거의 없다. 프로그래머가 왕인 회사, 그게 펄어비스의 정체성이다.
성장과 위기
4년을 갈아서 2014년 내놓은 게임이 검은사막이다. 자체 개발 엔진으로 만들었고, 개발비는 120억 원이었다. 대형 MMORPG치고는 어이없이 적은 금액이다. 보통 수백억에서 수천억이 드는 장르인데, 120억으로 세계 150개국 12개 언어 서비스 게임을 뽑아낸 것이다. 국내 반응은 처음에 미미했다. 그런데 해외에서 먼저 터졌다. 2015년 매출 217억, 2016년 616억, 2017년 1,172억. 2년 만에 5배 넘게 뛰었다.
2017년 코스닥 상장 때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공모주 청약이 미달됐다. 이 회사를 아무도 안 사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가 훗날 시총 5조 원을 찍게 된다.
2018년에는 아이슬란드 게임사 CCP게임즈를 약 2,524억 원에 인수했다. CCP는 SF MMORPG '이브 온라인'으로 누적 가입자 4,000만 명을 가진 회사였다. 2007년 기준 아이슬란드 소프트웨어 매출의 40%가 이브 온라인에서 나왔을 정도다. 근데 이 빅딜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CCP가 이브 온라인 이후 후속작들을 계속 흥행시키지 못하면서 수년간 적자가 쌓였고, 펄어비스 전체 재무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2019년 처음 공개된 차기작 붉은사막이 출시를 거듭 미루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사막 인기는 서서히 빠지는데 붉은사막은 안 나오고, 매출은 2019년 5,300억 원에서 2023년 3,400억 원대로 쪼그라들었다. 2023년부터 3년 연속 적자. 주가는 2021년 장중 14만 원을 넘기다가 2024년 4월엔 3만 원 밑으로 내려앉았다. 애널리스트 보고서에 '양치기 소년'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 시기에 알려진 비화가 하나 있다. 김대일 의장은 고 신해철의 팬이었는데, 2014년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데뷔 30주년 앨범 작업에 디지털 사운드 기술과 목소리 복원 기술을 지원했다고 한다. 코드만 짜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단서가 여기서도 나온다.
지금 뭐 하는 회사
2026년 3월 20일. 붉은사막이 드디어 전 세계 동시 출시됐다. 첫 공개로부터 약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초기 스팀 이용자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출시 직후 쏟아지는 혹평에 펄어비스는 평균 3~4일에 한 번꼴로 패치를 밀어넣었다. 총 9번. 그리고 현재 스팀 평가는 '매우 긍정적', 이용자의 83%가 긍정 후기를 남기고 있다.
판매량은 이렇다. 출시 첫날 200만 장, 4일에 300만 장, 12일에 400만 장, 26일에 500만 장. 83일에 600만 장을 넘겼다. 미국 게임 시장조사 기관 서카나 기준 2026년 상반기 누적 판매량 2위. 전체 판매의 80% 이상이 북미와 유럽에서 나왔다. 한국 콘솔 게임이 서구권에서 이 속도로 팔린 건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장당 가격을 약 10만 원으로 추산하면 출시 한 달 매출이 약 5,000억 원에 달한다. 펄어비스의 2025년 연간 매출이 3,656억 원이었으니 26일 만에 전년도 연간 매출을 뛰어넘은 셈이다. 스텔라블레이드가 600만 장을 넘기는 데 1년 8개월, P의 거짓이 400만 장에 2년 8개월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속도가 다르다.
현재 CCP게임즈는 2026년 매각 혹은 분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8년 동안 안고 갔던 짐을 내려놓는 수순이다. 직원 수는 1,360명, 본사는 경기도 안양에 있다.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3년 연속 적자를 내고 주가가 3만 원대까지 빠졌다가, 붉은사막 하나로 판이 뒤집혔다. 이것이 펄어비스 투자의 핵심 교훈이자 핵심 리스크다. 단 두 개의 IP로 여기까지 온 회사는 그 IP의 롱런 여부에 실적 전체가 달려 있다.
긍정 요인이 있다. 붉은사막은 단일 패키지 판매를 넘어 DLC, 콘텐츠 업데이트, PC·모바일 확장이라는 추가 수익 구조를 앞두고 있다. CCP 정리가 완료되면 수년간 발목을 잡아온 비용 구조가 개선된다. 자체 엔진 보유는 외부 의존 없이 빠른 패치와 글로벌 최적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자산이다.
리스크 변수도 있다. 검은사막과 붉은사막, 사실상 두 IP에 회사 전체가 걸려 있는 구조는 그 자체로 취약성이다. 붉은사막의 롱런이 꺾이면 다음 IP가 나오기까지의 공백 구간이 다시 문제가 된다. PC·모바일 확장 과정에서의 품질 유지, 그리고 기획자 없이 프로그래머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조직이 멀티 프로젝트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는가도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변수다.
쌀가게 아들이 3만 원 주가에서 만들어낸 것
안양 오피스텔 7명으로 시작해, 공모주 미달을 거쳐, 3만 원대 주가와 양치기 소년 소리를 들으면서, 7년짜리 게임으로 26일 만에 연간 매출을 넘겼다. 붉은사막 600만 장, 검은사막 글로벌 150개국, CCP 매각 후 재무 정상화. 이 세 개의 키워드가 펄어비스의 다음 챕터를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