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 하면 대부분 명동 본점, 센텀시티, 스타필드, 이마트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1997년 백화점 점포 딱 두 개와 조선호텔 하나만 들고 삼성에서 나온 데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재계 공룡 삼성에서 계열 분리할 때 신세계가 챙겨간 것이 그 전부였다. 그 초라해 보이는 출발이 지금 매출 35조 원이 넘는 유통 제국으로 자랐다. 약 20배다.
★ 창업 스토리 — 1930년 미쓰코시에서 시작된 96년
신세계의 뿌리는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미쓰코시 경성점이 시작이었다.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6·25 전쟁 때는 건물 전체가 미군 PX로 넘어갔다. 지금의 신세계 명동 본점 자리가 한때 미군 매점이었다는 말이다. 1963년 삼성그룹이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면서 '신세계'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1967년 대한민국 최초 바겐세일, 1969년 최초 신용카드 발급.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유통 문화의 씨앗을 신세계가 뿌린 것이다.
1979년, 이병철의 막내딸 이명희가 영업담당 이사로 회사에 출근하였다. 결혼 12년 차 전업주부였다. 경영은 해본 적도, 배운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백화점 사업을 맡으라고 했을 때 이명희 본인이 "자신 없다"고 했다는 것이 전해진다. 이병철이 역정 섞인 설득까지 동원한 끝에 결국 그녀가 회사에 나왔다.
출근 전날 밤, 이병철은 딸을 조용히 불러 몇 가지 지침을 주었다. '서류에 사인하지 마라', '어린이의 말이라도 경청하라',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하지 마라', '사람을 나무 기르듯 길러라'. 특히 첫 번째 지침은 전문 경영인에게 진짜 권한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가르침이 훗날 신세계 특유의 경영 스타일로 굳어진다. 이명희가 데려온 전문 경영인 중 핵심이 삼성 평사원 출신 구학서였다. 친언니 이인희(한솔그룹)와 스카우트 전쟁을 벌여 결국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 인물이 신세계 고속 성장의 일등공신이 된다.
★ 성장과 위기 — 이마트가 판을 바꾼 순간
1991년 이명희는 삼성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사실상 독자 경영을 시작하였다. 1997년 공정거래법상 완전히 계열 분리되었으며, 분리 7년 만에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 됐다.
결정적 한 방은 4년 전에 터졌다. 1993년 11월, 이명희가 미국에서 월마트·프라이스 클럽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이마트 창동점이 개점하였다. 국내 최초 할인점이었다. 개점 첫날 약 26,800명이 몰렸고 매출 1억 800만 원을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농심·동서 같은 식품 1위 업체들이 납품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마트에 납품하기 시작한 경쟁사 매출이 급등하자 결국 1위 업체들도 백기를 들고 들어왔다.
2006년 세계 최대 유통기업 월마트가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이마트가 그 16개 점포를 통째로 삼켰다. 까르푸도 한국에서 떠났다. 당시 이마트의 마진율은 29%로 월마트 23.1%·까르푸 21.4%를 웃돌았다. 2009년에는 부산 센텀시티점이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백화점'으로 등재되었다. 1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킨 뉴욕 메이시스를 면적으로 제쳤으며, 이 기록은 지금도 유효하다.
흑역사도 있다. 신세계는 1973년 대구에 2호점을 냈다가 실패하였는데, 지금 공식 연혁에서 그 점포는 없는 것처럼 처리되어 있다. 서울 영등포점(1984년)을 공식 2호점으로 소개한다. 실패한 기억을 공식 역사에서 조용히 지워버린 것이다.
2023년엔 이마트가 12년 만에 연간 영업손실 469억 원을 기록하였다. 3조 4,000억 원을 들여 2021년에 인수한 G마켓·옥션이 계속해서 적자를 내는 가운데 쿠팡이라는 공룡 앞에서 이커머스 전선이 흔들렸다. 그러나 2025년 이마트는 영업이익 3,225억 원으로 반등하였다. 전년 대비 584.8% 증가로, 본업 경쟁력 강화와 가격·상품·공간 혁신에 집중한 결과였다.
★ 지금 뭐 하는 회사
2024년 정용진·정유경 남매의 계열 분리가 공식화되었다. 정용진 회장은 이마트·스타필드·스타벅스(SCK컴퍼니)·이마트24·SSG닷컴·G마켓을, 정유경 회장은 신세계백화점·면세점·패션(신세계인터내셔날)·신세계센트럴시티를 맡는 한 지붕 두 회장 체제다.
스타필드는 그룹의 새 성장 엔진이다. 2016년 하남점 개점 이후 운영사 신세계프라퍼티 매출은 49억 원에서 2024년 4,300억 원으로 9년 만에 8,675% 뛰었다. 먹고 놀고 머무는 '체류형 유통' 개념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여온 것이 스타필드다.
★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SSG닷컴과 G마켓은 여전히 숙제다. 신세계그룹은 SSG닷컴 재무적 투자자 지분 전량을 1조 2,710억 원에 인수하며 완전 장악 체제를 구축하였다. 외부 투자자 눈치 없이 장기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G마켓은 알리바바 인터내셔널과의 합작법인(JV) 출범 이후 셀러·AI·글로벌 3대 축으로 재편 중이며, 7,000억 원 투자 계획 중 5,000억 원을 셀러 성장 지원에 배정하였다. 2026년 G마켓 1분기 거래액이 12% 성장하며 반등 신호가 포착되고 있다.
긍정 요인으로는 스타필드 체류형 유통의 구조적 성장세, 이마트 본업 영업이익 반등(+584.8%), 신세계백화점 '하우스 오브 신세계' 개점 1년 만에 매출 141% 신장이 있다. 리스크 변수로는 SSG닷컴 적자 구조 미해소, 쿠팡 연매출 40조 원대의 압도적 격차, G마켓 실적 정상화 시점의 불확실성이 병존한다. 신세계그룹 이커머스의 다음 챕터는 SSG닷컴이 독립 플랫폼에서 신세계 생태계의 디지털 인프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느냐, 그리고 G마켓-알리바바 JV가 글로벌 셀러 확장이라는 차별점을 실제 수익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삼성 품에서 나온 백화점 두 곳, 전업주부 막내딸의 경영 입문, 월마트를 쫓아낸 이마트, 세계 최대 백화점 센텀시티가 신세계의 정체성을 만든 네 가지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