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백화점의 출발점을 알면 조금 어이없을 수 있다.
1971년, 현대백화점의 전신인 금강개발산업은 현대건설로부터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지금의 명품 백화점 제국이 처음엔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사로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본사가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가 건물에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명품관 바로 옆 아파트 상가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다 2020년대 들어서야 대치동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아버지도 반대한 압구정 승부수
현대백화점을 이해하려면 정주영 회장의 셋째 아들 정몽근이라는 인물을 봐야 한다. 정몽구(현대차), 정몽헌(현대그룹), 정몽준(HD현대)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형제들과 달리 정몽근은 철저히 수면 아래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74년 금강개발산업을 맡아 사실상 현대백화점의 창업자가 됐으며, 초기엔 휴게소·호텔·케이터링으로 서비스업 DNA를 다졌다. 1977년 울산 동구에 현대쇼핑센터를 열었는데, 조선소 노동자들 유니폼을 납품하던 회사가 유통업으로 발을 넓히는 순간이었다. 이 울산 동구점이 사실상 현대백화점의 진짜 1호점이다.
진짜 승부수는 따로 있었다. 1980년대 초, 현대건설이 강남 압구정 일대에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정몽근은 그 근린상가 자리에 백화점을 짓겠다고 나섰다. 정주영 회장이 정면으로 반대했다. 백화점 경험도 없는 데다 옆에 고가도로가 있고 당시엔 허허벌판이라는 이유였다. 신세계그룹을 비롯한 다른 유통 업체들도 죄다 고사했다. 그러나 정몽근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아버지를 직접 설득해 결국 허가를 받아냈다. 1985년 압구정본점이 문을 열었다. 오픈 첫해에 백화점 업계 최초로 문화센터를 선보이고 식품관에 공을 들이는 밀착형 전략도 이때 탄생했다.
IMF가 만들어준 2위
1990년대 중반까지 현대백화점은 롯데·뉴코아·신세계에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그런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판세가 뒤집어졌다. 보수적인 경영으로 현금을 쌓아온 현대백화점은 부도난 백화점들을 차례로 인수했다. 나산백화점 부지로 천호점, 주리원백화점을 인수해 울산점, 그레이스백화점을 인수해 신촌점. IMF가 끝날 즈음엔 롯데에 이어 업계 2위 자리를 꿰찼다. 남들이 쓰러질 때 현금을 쥔 쪽이 이기는 게임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한섬 인수와 역전극
2세 경영자 정지선 회장 취임 이후 패션·가구·식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2012년 한섬 인수다. SK네트웍스가 한섬을 사려다 협상이 무산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현대백화점이 4,200억 원에 낚아챘다. 인수 직후 한섬 영업이익은 1,000억 원대에서 2013년 500억 원대로 반토막났고, M&A 실패 사례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반등이 시작되더니 2022년 기준 매출 1조 5,000억 원, 영업이익 1,600억 원대로 성장한 한섬은 이제 그룹 내 최대 알짜 인수로 평가받는다. 역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7년엔 오히려 한섬이 SK네트웍스의 패션 사업부를 역으로 인수했다. 한섬을 사려다 실패한 SK의 패션 사업을, 이제 한섬이 삼켜버린 것이다.
2022년에는 8,000억 원이 넘는 빅딜로 미국 매트리스 브랜드 지누스를 인수했다. 세계 최초로 매트리스를 압축 포장해 박스에 담아 배송하는 기술을 상용화한 회사로 아마존 매트리스 판매 1위다. 인수 직후 북미 경기 침체로 실적이 꺾였지만, 2025년 영업이익 258억 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실적 턴어라운드를 본격화하고 있다.
더현대서울과 현재 실적
2021년 여의도에 문을 연 더현대서울은 기존 백화점 공식을 완전히 깼다. 명품관 없이 팝업 스토어 중심으로 운영하는 이 공간의 외국인 관광객 비중은 2023년 초 3%대에서 2024년 14.6%로 급격히 확대됐다. K콘텐츠 팝업의 성지로 자리 잡은 결과다.
2025년 연결 기준 순매출 4조 2,303억 원, 영업이익 3,782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3.2% 급증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2018년 사업을 시작한 면세점이 7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영업이익 흑자(2억 원)를 냈고, 판교점은 매장 확장 없이 국내 백화점 최단기간 연매출 2조 원 돌파 기록을 세웠다. 2026년 1분기에도 백화점 부문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9.7% 성장하며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2026년 연간 영업이익을 4,300억~4,600억 원 수준으로 전망한다. 현재 주가 기준 예상 PER은 9배 안팎으로 밸류에이션 부담이 크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투자 관점 요약
현대백화점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하나 있다. 남들이 포기하거나 외면한 자리에 들어가서, 오래 버티다 결국 해낸다는 것이다. 압구정 허허벌판, IMF 시절 부실 백화점 인수, 한섬 인수 후 반토막 실적, 7년 만에 흑자를 낸 면세점, 고전하다 턴어라운드한 지누스까지. 매번 단기 성과보다 긴 호흡으로 결론을 냈다.
면세점 흑자 전환, 지누스 실적 개선, 더현대서울의 외국인 집객 확대가 동시에 맞물리는 국면이라는 점에서 지금 어떤 변곡점 위에 있는지 살펴볼 여지는 충분하다. 다만 내수 소비 침체, 명품 경기 변동, 글로벌 가구 시장 경쟁 강화 같은 리스크 변수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