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를 달리는 차를 한번 떠올려보자. 타이어. 그냥 고무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소재가 박혀 있다. 타이어코드라는 것이다. 전 세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타이어 절반에, 한 한국 기업의 소재가 들어가 있다. 절반.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 회사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삼성전자, 현대차, SK하이닉스는 누구나 아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 1위를 먹고 있는 회사 — HS효성첨단소재 이야기다.
삼성을 함께 만들고 쉰여섯에 혼자 나온 사람
HS효성첨단소재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한 인물이 나온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그는 스스로를 만우(晩愚)라 불렀다.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이 서른에 대학을 졸업했고, 마흔이 넘어 사업에 발을 들였다.
더 놀라운 건 그 이전 행적이다. 해방 직후인 1948년, 그는 이병철과 손잡고 삼성물산공사를 공동 설립해 부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1962년, 15년간의 동업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왔다. 나이 쉰여섯에. 삼성을 박차고 나와 혼자 시작한 것이다.
독립 후 그가 꽂힌 건 나일론 공장이었다. 1966년 동양나이론주식회사를 세우고, 설립 1년 만인 1967년 타이어코드 국내 최초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이 외국 기술에 기대고 있을 때, 조홍제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자국 기술진이 맡도록 밀어붙였다. 1960년대에 이미 '기술 독립'을 외친 사람이었다. 이때부터 이 회사의 DNA가 새겨진다 — "타이어코드 하면 효성."
1978년 건강 악화로 사업 일선에서 물러난 조홍제는 동양나이론을 장남 조석래에게 넘겼다. 이후 동양나이론은 효성에 흡수되며 소재 사업의 핵심 축이 됐다. 2018년 이 사업부가 드디어 독립 법인으로 태어났다 — 효성첨단소재. 그리고 2024년 효성그룹 계열분리 이후 현재는 HS효성첨단소재로 사명을 달고 있다.
세계 1위를 쌓아온 방식
동양나이론 시절부터 쌓아온 타이어코드 기술은 수십 년을 거치며 압도적인 세계 1위로 굳어졌다.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 기준 전 세계 시장 점유율 50%. 섬유코드 부문에서는 20년 이상 글로벌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타이어·금호타이어·넥센은 물론이고 미쉐린·굿이어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모두 고객사 명단에 올라 있다.
성장 방식이 흥미롭다. 2002년과 2005년 미쉐린 공장, 2006년 굿이어 공장을 차례로 인수했다. 경쟁사 공장을 사서, 그 경쟁사에 납품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2011년에는 스틸코드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인 18억 달러짜리 장기 공급 계약을 따냈고, 같은 해 세계 1위 에어백 직물 업체인 독일 글로벌 세이프티 텍스타일(GST)을 인수했다. 타이어코드에 스틸코드에 에어백까지. 자동차 사고 순간 당신을 잡아주는 시트벨트와 얼굴 앞에 펼쳐지는 에어백 소재도 상당 부분 이 회사에서 나온다. 시트벨트 원사와 에어백 원단 시장점유율도 세계 1위다.
그다음 도전은 탄소섬유였다. 철보다 10배 강하고 무게는 4분의 1인 꿈의 소재. 일본과 독일에서 양산을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 뛰어들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연구를 시작해 2011년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4번째로 탄소섬유 생산 원천기술을 확보했고, 2013년 전주공장에서 자체 브랜드 '탄섬'으로 양산화에 성공했다.
2019년 8월, 한일 무역갈등이 극에 달하던 그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효성첨단소재 전주 탄소섬유 공장을 방문했다. 1조 원 투자 협약식이 함께 열리며 순식간에 탄소섬유 국산화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전주 공장에는 대통령도 못 들어간 구역이 있다는 후문이 있다. 독자 개발한 방사·탄화 공정 유출을 막기 위해 핵심 공정은 철저히 봉쇄돼 있어 방문 당시에도 공장 전체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천억 벌어다 줄 비밀무기는 대통령에게도 안 보여줬다.
스틸코드 매각을 1년 만에 철회한 이유
2025년 초, 시장을 술렁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스틸코드 사업부 매각 추진이었다. 전체 영업이익의 40%가량을 버는 핵심 캐시카우를 팔아 1조 원 안팎의 현금을 확보하고 탄소섬유·실리콘 음극재 등 신사업 투자 재원으로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예비입찰에 국내외 사모펀드 10여 곳이 참여했고, 글로벌 사모펀드 베인캐피탈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협상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중국 경쟁사들의 저가 공세로 인한 마진 압박, 스틸코드 시장 성장성에 대한 이견이 발목을 잡았다. 처음 1조 원 수준이던 몸값 협상은 2025년 7월 기준 9,100억 원 수준까지 낮아진 채 접점을 찾지 못했고, 2026년 4월 3일 공식 철회를 공시했다. "추가적인 매각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 없으며, 스틸코드 핵심 제조사로서 역할을 다할 예정"이라는 것이 회사의 공식 입장이었다.
섬유코드와 스틸코드를 동시에 생산하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HS효성첨단소재 하나뿐이다. 고객사 대부분이 두 제품을 패키지로 계약하는 구조에서 스틸코드만 분리 매각할 경우 섬유코드 시장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 결국 철회 결정에 힘을 실었다.
지금의 HS효성첨단소재
2025년 연결 매출 3조 2,830억 원. 사업 축은 타이어코드(전체 매출의 60% 안팎), 탄소섬유·아라미드 슈퍼섬유, 에어백 직물 계열사 GST로 나뉜다.
스틸코드 매각 철회 이후 재원 확보를 위한 다른 길을 열었다. 유미코아로부터 음극재 업체 EMM을 약 2,000억 원에 인수하고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향으로, 실리콘 음극재를 차세대 배터리 소재 성장동력으로 낙점했다. 탄소섬유와 아라미드는 에너지·방산·우주항공 분야 수요 확대에 힘입어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으며, 2026년 2분기 영업이익은 631억 원(전분기 대비 77.3% 증가)으로 전망된다.
긍정적 요인은 구조적이다. 타이어코드 원재료인 PET칩 가격 인상 전 저가 원재료를 확보해 마진 개선 여지가 있고, EV 전환 가속화로 고하중 대응이 필요한 전기차용 타이어에서 스틸코드 수요가 구조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탄소섬유 부문의 중국 업체 저가 공세, 신사업 투자 재원 확보 과제, 실리콘 음극재 사업 수익화까지의 시간은 점검이 필요한 변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 1위를 지키는 회사. 그 전략의 다음 수가 탄소섬유와 배터리 소재라는 점에서, 지금 어떤 변곡점 위에 서 있는지 들여다볼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