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전자. 냉장고·세탁기·에어컨. 그 이미지가 워낙 강해 이 회사의 출발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출발점은 화장품이었다. 심지어 뚜껑이 자꾸 깨지는 바람에 사업 방향이 통째로 틀어진 회사다.
[동동구리무 — 깨지는 뚜껑이 역사를 바꾸다]
1947년, 부산 서대신동의 작은 공장에서 크림 하나가 탄생했다. 상표명은 '동동구리무'. 북을 치고 다닌다는 '동동'에, 크림의 일본식 발음 '구리무'를 붙인 이름이다. 잘 팔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유리 뚜껑이 자꾸 깨지면서 반품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깨지지 않는 소재를 찾다 눈에 들어온 것이 플라스틱이었다. 6·25 전쟁 한복판인 1951년, 구인회 창업주는 뚜껑 하나 때문에 플라스틱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정이 오늘날 LG화학과 LG생활건강의 뿌리가 됐다.
뚜껑 하나 제대로 못 만든 결과가 대기업이다.
[창업 스토리 — 포목상 청년에서 전자 제국까지]
LG의 진짜 시작은 1931년이다. 경남 진주의 청년 구인회가 포목상을 차렸다. 헝겊과 옷감을 파는 평범한 동네 가게였다. 해방 이후 부산으로 옮긴 구인회는 1947년 화장품 회사를 창업했다. 첫 제품 '럭키크림'이 대박을 쳤다.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뜻의 'Lucky', 이를 한자로 음차하면 '락희(樂喜)'다. 회사 이름 '락희화학공업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LG라는 이름의 뿌리는 화장품 브랜드 이름에서 왔다.
창업 초기부터 구인회 옆에는 든든한 동업자가 있었다. 사돈 관계였던 허만정 일가, 지금의 GS그룹 허씨 가문이다. 1941년부터 구씨 6·허씨 4의 지분 구조로 동업을 시작했고, 이 관계는 무려 60년 넘게 이어지다 2005년 GS그룹 분리로 마무리됐다. 한국 재벌사에서 이 정도 장기 동업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1958년 금성사가 세워졌다. 이듬해인 1959년, 'GoldStar' 상표를 단 국산 라디오 A-501이 세상에 나왔다. 한국 최초의 국산 라디오였다. 이 회사가 지금의 LG전자다. 화장품 뚜껑에서 전자제품으로 넘어가는 데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성장과 전환 — 이름을 버리는 결단]
1966년 흑백 TV, 1960~70년대 석유화학·에너지·반도체로의 확장. 여기까지는 성장 스토리다. LG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사업 확장이 아니라 이름 교체였다.
1995년 1월 1일 아침. 조간신문 1면 하단에 정체불명의 광고가 실렸다. 빨간 원 안의 이상한 마크, 그 아래 딱 한 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무 설명도 없었다. 4일 후 정체가 밝혀졌다. '럭키금성'이 'LG'가 되는 순간이었다. 36년 된 이름을 버리는 결단에 반발도 거셌다. 해외에서 통하려면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구자경 회장의 고집이 이겼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LG'라는 이름은 1990년부터 이미 대중에게 각인돼 있었다. MBC 청룡 야구단을 인수하며 팀 이름을 공모했는데, 'LG 트윈스'가 탄생한 것이다. 야구팀이 그룹명보다 5년 먼저 국민에게 LG를 팔았다. 그룹명 교체가 자연스럽게 넘어간 데는 LG 트윈스의 공이 작지 않다.
[우아한 분리 — LG다운 방식]
LG만의 독특한 전통이 있다. '우아한 분리'다. 창업주 구인회 이후 4대에 걸쳐 장남이 경영권을 승계하고, 형제들은 계열사를 들고 독립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이 과정에서 GS·LS·LX·LIG·희성 같은 그룹이 생겨났다. 독립한 회사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알파벳 'L'을 붙인다. LG에서 나왔다는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이자, 브랜드 자산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4대 승계는 더 드라마틱했다. 구본무 3대 회장의 외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딸들에게 승계하는 대신 선택한 길은 조카 구광모를 양자로 입양하는 것이었다. 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기 위해 법적 절차까지 밟은 결정이었다.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방식이었지만, LG답게 조용하고 단호하게 처리됐다.
[지금의 LG — 가전 회사에서 로봇 회사로]
2026년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 LG그룹은 자산총액 기준 한국 재계 4위다.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3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12개 상장 계열사 합산 시총은 2026년 5월 기준 약 222조 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LG전자는 2026년 1분기 매출 23조 7,272억 원, 영업이익 1조 6,737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1분기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증가율은 32.9%다. 가전 부문은 구독 사업과 온라인 판매 확대, 전장(자동차 부품) 부문은 수주잔고를 기반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지금 LG전자가 가장 공들이는 건 가전이 아니다. 로봇이다.
2026년 6월 30일, 연말 정기 조직개편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CEO 직속 '로보틱스사업센터'를 전격 신설했다. 사업개발·영업·오퍼레이션 기능을 하나로 묶은 완결형 조직이다. 산하에는 로봇 학습용 데이터팩토리 전담 조직도 배치했다. 연말 인사를 이렇게 앞당긴 것은 로봇 사업화에 그만큼 속도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엔비디아와의 피지컬 AI 협력 확대도 같은 맥락이다. 류재철 대표이사는 "엔비디아 AI 플랫폼과 LG전자의 로봇 기술을 결합해 차세대 피지컬 AI 생태계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림 뚜껑에서 시작한 회사가, 이제 로봇파운데이션모델(RFM)을 설계하고 있다. 방향이 바뀔 때마다 LG는 달라졌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긍정요인: 1분기 어닝 서프라이즈, 전장·구독·B2B 고수익 구조 정착, 로보틱스사업센터 신설로 피지컬 AI 사업 가속화, 엔비디아 파트너십 확대
#변수: 미국 관세 정책 불확실성, 대중 경쟁 심화, 거시경제 둔화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