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한양행 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안티푸라민', '청렴한 기업', '전 재산 사회 환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회사를 세운 사람이 원래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 팔던 식품 벤처 사업가였다는 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유일한 박사는 GE에 다니다 때려치우고 창업을 했는데, 아이템이 다름 아닌 숙주나물 통조림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중국 요리점이 넘쳐났는데 만두에 들어갈 숙주나물을 신선하게 유통할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은 여기서 기회를 봤다. 열처리 보존법을 개발하고 1922년 '라초이(La Choy)'라는 식품회사를 세웠다. 6년 만에 직원 400명, 연 매출 200만 달러짜리 회사로 키웠다. 지금 돈으로 치면 250억 원 규모다. 27살 청년이.
그런데 이 잘나가던 미국 사업가가 갑자기 조선으로 돌아왔다. 왜? 바로 이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창업 스토리]
1925년, 유일한은 사업차 잠깐 귀국했다가 충격을 받는다. 국권을 빼앗긴 채 빈곤과 질병 속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그는 결심한다. 미국에서 좋은 약을 가져와 제대로 된 가격에 팔겠다고.
1926년, 서울 종로에 유한양행이 문을 열었다. 그냥 약방이 아니었다. 성분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가격을 고정했다. 신문 광고에는 약 이름 대신 버드나무 그림을 크게 실었고, 카피는 "의사는 당신의 친우"였다. 약을 많이 팔려는 회사가 아니라 약을 제대로 쓰게 하려는 회사. 1920년대 제약사가 이런 마케팅 철학을 가졌다는 게 이미 반전이다.
버드나무 로고에도 비화가 있다. 유일한이 귀국 전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를 찾아가 창업 계획을 밝히자, 서 박사가 딸에게 부탁해 버드나무 목각품을 선물했다고 한다. 한민족에게 그늘과 희망을 주는 기업이 되라는 당부였다.
[성장과 위기]
1933년, 유일한의 아내 호미리 여사의 조언을 받아 자체 개발한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 탄생한다. 수십 년째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그 빨간 연고다. 지금도 유한양행의 대표 제품이다.
1936년에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종업원 지주제 사례 중 하나가 유한양행에서 나왔다.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직원들이 자기 회사 주식을 보유하게 만든 것이다. 1962년에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주식을 상장했다.
1938년, 사업차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태평양 전쟁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게 됐다. 창업자 없는 사이 일제의 세금 압박으로 회사가 흔들렸다. 그런데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그냥 있었던 게 아니었다. CIA의 전신 OSS(전략첩보국)의 한국 담당 첩보 요원으로 활동했다. 항일 무장 독립군 창설에도 관여했다. 제약사 창업주가 비밀 스파이였다니, 이쯤 되면 영화 소재가 맞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유일한 박사는 정치자금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보복으로 국세청 세무조사를 수개월간 받았다. 박정희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결과가 뭐였냐고? 당시 세무조사원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 안 나는 경우가 있구나." 세무조사를 역으로 청렴 인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196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유일한 박사는 가족이 아닌 공채 출신 직원을 후임 사장으로 앉히는 전통을 세웠다. 그리고 1971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장이 압권이다. 본인이 가진 유한양행 주식 전부(발행주식의 20.6%)를 교육·사회사업 기금에 기증했다. 장남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말 한 마디, 손녀에게는 학자금으로 1만 달러만 남겼다. 회사 지분 20% 오너가 자식한테 남긴 게 단돈 1만 달러라니. 대를 이어 딸 유재라 여사도 1991년 전 재산 200억 원을 유한재단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뭐 하는 회사 — 창립 100주년의 성적표]
2026년, 유한양행이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 100주년의 성적표가 심상치 않다.
2025년 연결 기준 매출이 2조 1,866억 원, 영업이익이 1,043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5.7%, 영업이익은 90.2% 증가했다. 당기순이익은 관계기업 투자주식 처분 이익 증가 등에 힘입어 전년 대비 235.9% 늘어난 1,853억 원을 기록했다. 실적 폭발의 주인공은 렉라자(레이저티닙)다.
2018년 유한양행은 폐암 치료 신약 레이저티닙을 존슨앤드존슨 자회사 얀센에 1조 4,000억 원 규모로 기술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렉라자와 얀센의 아미반타맙 병용요법(1차 치료제)은 미국 FDA(2024년 8월 19일), 유럽 EC(2025년 1월 20일), 일본 PMDA(2025년 3월 27일), 한국 MFDS(2025년 6월 2일), 중국 NMPA(2025년 8월 8일)에서 연이어 허가를 획득했다. 불과 1년 사이에 5개 주요 시장에서 연달아 허가를 받은 것이다. 세계 최대 암 치료 지침서인 NCCN 가이드라인에서 폐암 1차 치료 최선호 요법으로도 등재됐다.
재미있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렉라자는 유한양행이 처음부터 직접 개발한 게 아니다. 2015년 국내 바이오기업 오스코텍이 개발한 물질을 유한양행이 기술도입해 글로벌 임상을 진행한 것이다. 기술료 수입의 40%를 원개발사 오스코텍과 나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교과서 같은 사례다. 또 렉라자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기 전, 경제적으로 어려운 암 환자 900여 명에게 무상으로 공급했다. 유일한의 정신이 100년 뒤에도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배구조도 독특하다.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는 유한재단과 유한학원 같은 공익법인이다. 창업 이후 역대 대표이사가 전원 공채 출신 전문경영인이었다. 창업주의 말 한 마디 —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며, 개인은 단지 관리를 맡을 뿐" — 가 100년 동안 그대로 살아있는 구조다.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렉라자는 현재 글로벌 연매출 1조 원을 넘어서는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유한양행이 앞으로 받을 마일스톤 잔액은 아직 6억 5,000만 달러 이상이 남아 있다.
단, 2026년 1분기 기준으로 마일스톤 유입 시점이 이연되면서 영업이익이 컨센서스를 대폭 하회하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함께 보아야 한다. 실적이 마일스톤 타이밍에 따라 출렁이는 구조라는 뜻이다.
#긍정요인: 2025년 사상 최대 실적(매출 2조 1,866억 원·영업이익 +90.2%·순이익 +235.9%), 렉라자 5개 시장 연달아 허가 완료, 2026년 유럽 출시 본격화, 로열티 수익 구조화로 안정적 현금흐름 확대, 오스코텍·YH14618·YH12852 등 기술수출 파이프라인 풍부
#변수: 마일스톤 유입 타이밍에 따른 분기 실적 변동성 극심, 1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 대폭 하회 패턴 반복, 렉라자 외 파이프라인 임상 결과 불확실성, 글로벌 경쟁 신약 등장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