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멘트 주주가 제약업에 뛰어든 이야기, GC녹십자의 57년
군대에서 맞는 유행성출혈열 백신, 그리고 2009년 신종플루 공포를 잠재운 국산 백신. 전부 한 회사 이야기다. 이 회사의 뿌리를 파고들면 뜬금없이 한일시멘트가 나온다. 시멘트로 돈 번 사람이 제약업에 지분을 넣은 것이다. 거기에 감미료 브랜드도 운영하고, 살충제 사업도 했던 시절이 있다. 혈액제제·감미료·살충제. 이게 한 회사 히스토리에 다 들어 있다는 게 GC녹십자 이야기의 시작이다.
창업 스토리
1967년, '수도미생물약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애초에 동물용 백신을 만들려고 세워졌다. 사람 치료제가 아니라 소·돼지 백신 회사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 1969년 인체용 의약품 쪽으로 전환하면서 극동제약으로 이름을 바꿨고, 1971년에 지금의 '녹십자'가 됐다.
이 회사에 지분을 투자한 인물이 한일시멘트 창업주 고 허채경 회장이다. 시멘트로 쌓은 자본을 제약업에 투입한 사례였다. 그의 자녀들은 이후 사업을 나눠 맡았다. 장남 허정섭이 한일시멘트를, 차남 허영섭이 GC녹십자를 이어받았다. 한 집안에서 시멘트와 혈액제제가 나온 셈이다.
녹십자에서 진짜 중요한 인물은 차남 고 허영섭 회장(1941~2009)이다. 서울대 공과대학 금속공학과를 졸업 후 독일 아헨 공과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병역 문제로 귀국해 극동제약 공무부장으로 입사했다. 야망을 품고 들어간 게 아니라 군대 문제로 귀국하다 보니 합류한 케이스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렸다.
당시 국내 제약업계 분위기는 '해외약 복제해서 팔기'가 주류였다. 수익성 낮은 백신이나 혈액제제는 국가 주도 사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남들이 쉬운 길로 갈 때 허영섭은 굳이 어렵고 돈 안 되는 필수의약품 개발에 올인했다. 1980년 대표이사가 된 이후 이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성장과 위기
초기 성장의 발판은 뜻밖의 제품이 만들었다. 1973년 국내 최초로 혈전용해제 유로키나제 생산을 시작했는데, 이 제품이 초기 현금흐름을 만들어주면서 백신·혈액제제 연구개발의 종잣돈이 됐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했다.
이후 '세계 최초' 기록이 쌓이기 시작했다. B형간염 백신을 세계 세 번째(1983년), 유행성출혈열(한타바이러스) 백신을 세계 최초(1988년), 수두백신을 세계 두 번째(1993년)로 개발했다. 한타바이러스 백신의 경우 임상시험이 한창 진행되던 중 군 대량접종 백신으로 바로 결정됐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그러면서도 이 회사 역사에는 엉뚱한 사업이 섞여 있다. 1992년에는 저칼로리 감미료 브랜드 '그린스위트'를 미원(지금의 대상)에 양도했다. 혈액제제 회사가 감미료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5년에는 살충제 사업부 '녹십자양행'도 설립했다가 2000년에 매각했다. 핵심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업들을 하나씩 정리한 흔적이다.
그리고 2009년. 이 해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다. 신종플루 팬데믹이 세계를 덮쳤을 때 GC녹십자는 국산 백신을 세계 여덟 번째로 판매 허가를 받아내며 국가 방역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15일, 허영섭이 세상을 떠났다. 마치 필생의 과업을 마치고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이는 타이밍이었다.
이후 경영을 이어받은 3세 허은철 대표의 최대 승부수가 면역글로불린 제제 '알리글로'다. 세 차례 FDA 임상보완요구(CRL)를 거치는 고비를 넘기며, 10% 고농도 정맥주사 제형으로 전략을 확정해 도전했다. 2023년 12월 FDA 승인을 받았고, 2024년 7월 첫 선적과 함께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첫 FDA 허가 도전부터 허가까지 약 8년의 뚝심이었다.
지금 뭐 하는 회사
2025년 연간 매출이 약 1조 9,913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대비 18.5% 증가한 수치다. 7년간 적자를 이어오던 4분기도 흑자 전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수익 체질 개선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2조 클럽은 이제 시간 문제처럼 보인다. 2026년 1분기에는 연결 기준 매출 4,355억원, 영업이익 117억원을 기록했고, 이는 전년 동기 대비 매출 13.5%, 영업이익 46.3% 증가한 수치다. Insightkorea + 2
별도 기준 사업 부문별로는 혈장분획제제(5,602억원), 백신제제(3,006억원), 처방의약품(4,798억원), 일반의약품 및 소비자헬스케어(1,197억원) 순이다. 알리글로는 연간 약 1,500억원(약 1억 600만 달러)을 상회하는 미국 매출을 기록하며 실적 성장을 이끌었다. 출시 1년 만에 누적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고, 회사는 2028년 미국 매출 3억 달러를 목표로 제시했다. GcbiopharmaThebell
헌터증후군 치료제 '헌터라제'는 전년 대비 약 20% 성장한 744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수두백신 '배리셀라주'는 321억원으로 매출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됐다. 헌터라제는 2002년 삼성서울병원 교수의 연구를 회사가 받아 공동개발한 산학협력의 결과물로, 세계 시장에서 미국 제품과 경쟁하는 몇 안 되는 국산 희귀질환 치료제다. Thebionews
수출 쪽도 분위기가 다르다. 제62회 무역의 날에 '3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고, 해당 기간 동안 전년 대비 37% 성장한 3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WHO 산하 국제 조달 시장(PAHO, UNICEF)에서 독감백신 점유율 1위도 유지하고 있다. Kdsn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GC녹십자가 흥미로운 건 '단일 히트 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혈액제제라는 반세기 된 캐시카우가 버티는 가운데, 알리글로가 미국 시장에서 침투율을 높이고 있고, 헌터라제가 희귀질환 시장에서 꾸준히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세 개의 다른 엔진이 각자의 속도로 돌아가는 구조다. 미국 관세 정책에서 혈장분획제제가 면세 대상에 포함되면서 미국 사업의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점도 긍정적 변수다. M-economynews
다만 알리글로가 미국 시장에서 예상만큼 빠르게 침투율을 높일 수 있는지, 수익성 개선이 지속 가능한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미국 원료 혈장 확보를 위해 ABO플라즈마를 1,380억원에 인수하는 등 대규모 투자가 선행됐고, 수직계열화 완성까지 현금 부담이 남아 있다는 점도 변수다.
그럼에도 이 회사가 보여주는 패턴은 일관된다. 남들이 포기하는 필수의약품 영역에 집중하고, 세계 최초·최초를 하나씩 쌓아가며, 그 성과가 20~30년 후에 캐시카우가 되는 구조. 허영섭이 만들어놓은 궤도 위에서, 지금의 GC녹십자는 알리글로라는 새 궤도를 추가하고 있다.
혈장분획제제, FDA 신약, 희귀질환 — 이 세 키워드가 GC녹십자의 다음 10년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