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 2대로 시작해서 전 세계 장갑 원료 1위가 된 회사
병원에서 의사가 끼는 파란 고무장갑. 그 장갑의 원료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전 세계 의료용 라텍스 장갑 4개 중 1개 이상은 같은 회사의 원료로 만들어진다. 그 회사 이름이 금호석유화학이다.
이 회사, 원래 화학이랑 아무 관계없는 곳에서 출발했다. 1946년 광주에서 중고 미제 자동차 2대로 시작한 택시 회사. 그게 진짜 시작이다. 그리고 이 회사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데는 형제끼리 치고받은 싸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싸움에서 나온 게 오히려 회사를 살렸다.
창업 스토리
창업주 박인천(1901~1984). 나주 출신, 자수성가의 교과서 같은 인물인데, 사실 '자수성가' 전에 '수십 번 실패'라는 챕터가 먼저 있다. 목화 실면 장사, 잡화상, 미곡상, 가마니 장사, 무명 장사. 다 해봤고, 다 망했다.
일제강점기엔 공직에 들어가 순사로 일했는데 여기서도 드라마가 있다. 전쟁 말기 일제가 강제 징용자 모집 명령을 내리자 이를 거부하다가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당한 에피소드가 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혼잣말로 "이러다 일본이 진짜 지는 거 아니야?"라고 중얼거린 게 일본인 형사 귀에 들어가 상부에 보고됐다. 덕분에 파면됐지만, 이게 오히려 광복 후 반민특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말 한마디가 커리어를 날리는 동시에 목숨과 사업의 발판을 살려준 셈이다.
공직을 잃은 박인천은 퇴직금으로 1935년형 포드 디럭스와 1933년형 내쉬, 낡은 미제 자동차 2대를 사서 1946년 광주택시를 창업한다.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지금의 금호고속)로 버스 사업을 확장하고, 버스를 굴리다 보니 타이어가 필요해졌다. 1960년 삼양타이어(지금의 금호타이어)를 세운 이유다. 타이어를 만들다 보니 이번엔 고무가 필요해졌다. 이 논리적 연결이 결국 1970년 한국합성고무 설립으로 이어진다. 이 한국합성고무가 바로 금호석유화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다.
택시에서 버스, 버스에서 타이어, 타이어에서 합성고무. 사업의 수직 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1970년대엔 이미 재계 10위권. 택시 2대로 출발해서 20년 만에 이룬 결과다.
성장과 위기
1973년 울산에 SBR 공장, 1979년 여수에 BD 공장, 1980년 BR 공장, 1983년 SB라텍스 공장. 공장 하나씩 쌓아올리며 성장하던 금호석유화학은 1985년 한국합성고무와 금호화학을 합병하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1987년 증권거래소 상장까지 완료.
그런데 진짜 터닝포인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바로 형제간 싸움이다.
2006년과 2008년, 형 박삼구 회장 주도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했다. 문제는 규모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빅딜이었고, 2010년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산업은행이 워크아웃을 선언하고, 금호타이어·금호산업은 워크아웃, 금호석유화학은 채권단 자율협약으로 분류됐다.
이 과정에서 박찬구 회장(동생)은 형 박삼구로부터 화학부문 회장직 해임을 당했다가 경영에 복귀하면서 명함과 문서 서식에서 금호그룹 윙로고를 전부 떼어내는 결정을 한다. 명함에서 로고를 뜯어내는 것으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5년 넘게 이어진 형제의 난은 결국 법정에서 계열 분리로 결론이 났다.
훗날 형 박삼구가 이끈 금호아시아나는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분리 이후 금호석유화학은 독립적으로 성장의 길을 간다. 싸워서 나온 게 오히려 회사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2020년, 아무도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전 세계 병원과 약국에서 의료용 장갑 수요가 폭발했고, 그 장갑의 핵심 원료인 NB라텍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회사가 금호석유화학이었다. 2019년 3,700억 원 수준이던 영업이익이 2021년 무려 2조 4,000억 원으로 뛰었다. 2년 만에 6배 이상. 단일 소재 하나가 회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물론 이 특수는 영원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증설에 뛰어들었고, 엔데믹 이후 공급과잉이 찾아오면서 NB라텍스 가격은 고점 대비 크게 빠졌다. 2021년 3월 톤당 2,054달러를 찍었던 가격이 급락하며 업황 침체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 뭐 하는 회사
2025년 연결 기준 매출은 전년 대비 3.4% 감소, 영업이익은 0.4% 감소로 침체된 석유화학 업황 속에서도 흑자를 유지했다. 자산규모 10조 원, 대기업집단 순위 50위의 준대기업이다. 상장사는 금호석유화학 하나이며 이 외 16개 계열사가 있다.
2026년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1조 7,800억 원(전년比 -6.7%), 영업이익은 594억 원(전년比 -50.7%)을 기록했다.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판매단가 상승이 제한됐고, 전년 동기 실적 호조에 따른 역기저 영향도 작용했다.
사업 구조는 합성고무, 합성수지, 정밀화학이 핵심이고, 탄소나노튜브(CNT), 에너지(열병합발전·태양광·풍력), 건자재, 리조트까지 영역이 꽤 넓다. NB라텍스 수출의 80% 이상이 말레이시아로 향하는데, 말레이시아에는 세계 최대 장갑 업체들이 몰려있다. 미국이 중국산 의료용 장갑에 100% 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산 점유율이 급락했고, 반사이익이 말레이시아 장갑 업체들로 흘러들어오는 구조다. 말레이시아 업체들이 장갑을 더 만들수록 금호석화 라텍스를 더 사간다. 미중 무역전쟁의 나비효과가 여기까지 연결되는 셈이다.
미래 먹거리로는 전기차용 SSBR(솔루션스타이렌부타디엔 고무)을 눈여겨볼 만하다. SSBR은 타이어의 마모, 내구성, 연비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고기능성 합성고무로, 전기차 무게와 배터리 소비 특성에 맞춘 타이어 수요가 늘수록 SSBR 사용량도 함께 증가한다. 전기차 보급 확대가 장기적으로 금호석화 합성고무 사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드는 구조다.
합성고무는 스프레드 개선과 라텍스 수요 회복으로 판매가 증가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기 쌓였던 재고 소진과 함께 2025~2026년 들어 수요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긍정 요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전 세계 NB라텍스 1위라는 독점적 포지션, 미중 무역전쟁발 말레이시아 장갑 업체 수혜, 전기차 확대로 인한 SSBR 장기 성장 가능성이다.
다만 변수도 뚜렷하다. 석유화학 전반의 공급과잉과 중국발 저가 경쟁이 계속되고 있고, 2026년까지 주요 제품에서 수요 증분을 크게 상회하는 공급량 증가가 지속될 것으로 보여 당분간 수익성 개선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NB라텍스 단일 품목에 대한 실적 의존도가 높아, 가격 회복 시점이 핵심 변수다.
택시 2대로 시작해서 합성고무 세계 1위까지. 그 길에 수십 번의 실패, 파면, 형제의 난, 팬데믹 특수가 모두 들어 있다. 박인천의 수직 통합 논리가 씨앗이었다면, 코로나가 그 씨앗에 물을 부었고, 계열 분리가 홀로 서는 힘을 줬다.
NB라텍스 독점, 수직통합 DNA, 미중 무역전쟁 수혜 — 이 세 키워드가 금호석유화학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