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고기 회사가 5조 빚더미 해운사를 인수한 진짜 이유
닭고기로 먹고사는 회사가 배를 산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2014년, 하림그룹이 5조 원짜리 빚을 안고 법정관리 중인 해운사 팬오션을 인수하겠다고 나섰을 때 시장 반응은 딱 그랬다. '저 회사 이제 망하는 거 아냐?' 글로벌 사모펀드 KKR도 손을 털고 나간 매물이었다. 근데 결론부터 말하면, 하림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팬오션의 역사는 단순한 해운 회사 스토리가 아니다. 세 번의 사명 변경, 두 번의 법정관리, 창업주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닭고기 회사의 등장. 60년 역사가 드라마 한 편 분량이다.
창업 스토리
시작은 1966년이다. 박건석 회장이 범양전용선이라는 이름으로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원래 무역상사 출신이었는데, 배가 돈이 된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챈 사람이었다. 설립 1년 만에 5만 3천 톤급 유조선 4척을 들여올 정도로 공격적이었고, 1974년에는 32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까지 신조 인수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대형 VLCC 한 척 가격이 수천억이라는 걸 감안하면 박건석 회장이 얼마나 배짱 있게 밀어붙였는지 느껴진다.
사업 범위도 넓혔다. 해운에서 식품, 냉방기기, 항공, 운수까지. 1984년에는 삼미해운과 세방해운을 인수해 재계 27위까지 올라섰다. 흔히 말하는 문어발 확장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게 성공 공식이었다.
그런데 1987년, 박건석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 1조 1,200억 원에 달하는 빚, 국세청 세무조사 압박, 인간관계의 불화가 겹쳤다. 거대한 해운 제국을 쌓아 올린 창업자의 죽음과 함께, 범양상선은 첫 번째 법정관리로 들어갔다.
성장과 위기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나온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범양상선이 오히려 알짜 회사가 된 것이다. 10여 년의 법정관리 기간 동안 1조 원에 달하는 채권 원리금을 단 한 번의 연체 없이 갚았고, 10년 연속 흑자를 이어갔다. 법정관리가 체질 개선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2002년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새 주인을 찾던 범양상선에 손을 내민 건 STX그룹의 강덕수 회장이었다.
강덕수 회장의 그림은 명확했다. 엔진을 만들고(STX엔진), 배를 짓고(STX조선해양), 배로 물건을 나른다(STX팬오션). 수직계열화 완성. 타이밍도 기막혔다. 2004년 이후 중국이 철광석 순수입국으로 전환하면서 벌크 해운 수요가 폭발했다. 철광석, 석탄, 곡물을 실어 나르는 벌크선이 황금 배가 되던 시절이었다. STX팬오션은 2008년 매출 10조 원, 영업이익 6,700억 원을 찍었다. 해운사 맞나 싶을 숫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STX팬오션은 2005년 한국 기업 최초로 싱가포르 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2007년 한국거래소에도 상장해 두 거래소 동시 상장 최초 국내 기업이 됐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 가장 존경받는 기업' 3년 연속 1위 타이틀도 달았다. 화려한 정점이었다.
그 정점이 오래 가지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BDI(건화물 운임지수)가 폭락하면서 STX팬오션의 현금 흐름도 함께 무너졌다. 2007년 말 차입금 대비 현금흐름 비율이 102.8%였던 게 2010년에는 9.4%로 떨어졌다. 자유낙하다. 설상가상 STX그룹은 크루즈선사 인수, 중국 조선소 건설 등 무리한 확장을 이어가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금리는 6%인데 영업이익률이 6%가 안 됐다. 번 돈보다 이자가 많은 구조였다.
2013년 5월,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부채총계 4조 6,392억 원, 자본총계 2,409억 원, 부채비율 1,925%. 숫자가 너무 커서 감이 안 올 정도다. '가장 존경받는 기업' 타이틀을 달았던 회사가 불과 몇 년 만에 이렇게 됐다. 타이밍의 아이러니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하림이 등장한다. 닭고기 하림. KKR 같은 글로벌 사모펀드도 포기하고 나간 자리에 하림이 단독으로 남아 1조 79억 원을 써냈다. 주변의 시선은 차가웠다. 승자의 저주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하림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했다. 닭을 그렇게 많이 키우려면 사료를 어마어마하게 수입해야 한다. 그 사료를 나르는 배를 직접 갖겠다는 것이었다. 자기 물량만 채워도 배가 굴러간다. 뒤집어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수직계열화였다.
결과는? 법정관리 시작 2년 2개월 만인 2015년 7월, 팬오션은 회생절차를 종료했다. 부채비율은 1,925%에서 200% 미만으로 내려왔다. 이 숫자 하나가 팬오션의 회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지금 뭐 하는 회사
오늘날 팬오션은 국내 1위 벌크 해운사다. 2026년 1분기 기준 벌크선 218척, 비벌크선 45척 등 총 263척을 운용 중이다. 주요 거래처는 포스코, 브라질 최대 광산기업 VALE, 현대글로비스, 한국가스공사 등이다.
2026년 1분기 실적은 매출 1조 5,089억 원, 영업이익 1,409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 8.3%, 영업이익 24.4% 증가하며 시장 전망치를 상회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당기순이익은 945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2% 증가했다.
부문별로 보면 벌크 영업이익 547억 원(+14.2%), 탱커 281억 원(+41.5%), LNG 472억 원(+49.8%)이었고 컨테이너는 90억 원(-42.9%)이었다.
지금 가장 큰 화두는 탈벌크다. 팬오션은 4월 30일 SK에너지·SK인천석유화학과 VLCC 10척을 투입하는 장기화물운송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계약 기간은 2026년 5월 29일부터 2030년 4월 28일까지다. 벌크선 중심의 수익 구조에서 벗어나 탱커와 LNG 운송 비중을 높이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는 중이다.
유안타증권 중장기 추정치에 따르면 2026년 연간 매출액은 5조 9,800억 원(+10.1%), 영업이익은 5,570억 원(+13.2%)이 전망된다.
투자 관점에서 보는 포인트
팬오션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BDI, 즉 건화물 운임지수다. 벌크선 수익이 BDI에 연동된다. BDI가 오르면 팬오션 주가가 오르고, BDI가 내리면 팬오션 주가가 내린다는 게 단순화된 도식이다. 근데 이 도식이 점점 바뀌고 있다. 탱커와 LNG 비중이 높아지면서 BDI 단일 지표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지는 방향이다.
미·이란 전쟁 이후 BDTI(탱커운임지수)가 53% 폭등하면서 팬오션 탱커 부문이 직접 수혜를 받았다. 동시에 벌크 부문은 중국향 철광석·보크사이트 수요 강세가 뒷받침되고 있다. 두 개의 엔진이 동시에 돌아가는 구조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
2027년까지 VLCC 신조 3척, 중고 10척 도입이 예정되어 있어 에너지 수송 사업 확장 계획이 진행 중이다. 이 선박들이 가동 궤도에 오르면 수익 구조의 변화가 더 뚜렷해질 전망이다.
다만 리스크도 있다. 대규모 선박 도입에 따른 감가상각 부담, BDI가 예상보다 빠르게 꺾일 경우 벌크 부문 실적 하락, 지정학 변수에 따른 운임 변동성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변수다.
닭고기에서 해운으로, 범양에서 팬오션으로, 두 번 망했다가 두 번 살아난 이 회사. 60년 역사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위기 때마다 누군가 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배가 결국 굴러갔다.
벌크 1위, 탈벌크 전환, 하림 수직계열화 — 이 세 키워드가 지금 팬오션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