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투자일기] 1902년 5세 영친왕이 세계 최연소 은행장이 됐다 — 126년 뒤 우리금융지주

by 우노디야 2026. 5. 30.
반응형

1902년, 겨우 5세였던 영친왕이 은행장에 임명됐다. 고종의 7남 이은이 대한천일은행 제2대 은행장직을 맡게 된 것은 황실이 16주를 인수하며 대주주가 됐기 때문이었다. 세계 금융사상 최연소 기록에 해당하는 이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금융지주의 뿌리다. 126년 전 대한제국 시절부터 시작된 이 회사는 지금도 매년 1월 1일 임원진이 홍유릉을 찾아 고종황제와 영친왕에게 참배를 올린다.


창업 스토리

1899년 고종황제가 직접 나섰다. 일본 은행들이 조선 땅에 우후죽순 생겨나자 '우리 것'이 필요했다. 고종은 황실 예산인 내탕금 3만 원을 내놓으며 대한천일은행 설립을 지시했다. 현재 가치로 약 60억 원 규모였다. 창립 정관에는 "조선 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했다. 철저한 민족자본 은행이었다. 창립청원서에는 "화폐융통은 상무흥왕의 본"이라며 돈 융통이 곧 국가 발전의 근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황실 출자 비중이 54%에 달했으므로 황자가 은행장이 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성장과 위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자본금 불입이 여의치 않아 정부로부터 국고금 5만 원을 빌려야 했다. 영친왕이 은행장이 되면서 서민들이 이용하는 일반은행이 아닌 황실과 고위층 전용 특수은행으로 성격이 변질됐다. 1905년 경제 불황과 경영 실패가 겹치며 1906년 6월부터 약 1년간 휴업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에는 '대한'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어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했고, 해방 후에는 한국상업은행이 됐다. 1998년 IMF 사태 때 한일은행과 함께 부실은행 14곳에 이름을 올렸다. 1999년 두 은행이 합병하며 한빛은행이 탄생했고, 공적자금 3조 2,642억 원이 투입됐다. '한국의 빛·큰 빛·하나되는 빛'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은 12만 명이 참여한 공모로 정해졌다.


지금 뭐 하는 회사인가

우리금융지주는 시가총액 약 15조 원 규모의 4대 시중은행 중 하나다. 은행 의존도가 99%로 주요 금융지주 중 가장 높아 사실상 순수 은행업에 집중하는 구조다. 삼성전자·CJ·한화·포스코 등 대기업과 KAIST·포스텍·연세대 등 주요 대학의 주거래 은행이다. 한국철도공사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하다. 2022년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 '우리금융타운' 부역명을 달았다. 명동역 인근에 우리금융그룹 임직원만 3,000명이 넘게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 포인트

26년 만의 완전 민영화로 경영 자율성을 확보했다. 다만 2025년 순이익 증가율 1.8%는 KB금융(15.1%)·신한금융(11.7%)과 비교해 성장 속도가 느리다. 주주환원율도 36.6%로 경쟁사들의 50%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증권가의 목표주가 상향이 이어지고 있지만 은행 의존도 집중과 비은행 부문 다각화 속도는 중장기적으로 함께 점검해야 할 변수다.

반응형